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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레이디스

이기희

 

 
Part 10
 
 
 

 

 문을 나서자 장대같은 비는 여전하였다. 잠시 따스한 열기에 녹아들었던 몸이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물이 왜 그다지도 차갑던지 이제 발을 들여놓기가 너무나 망설여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온몸을 뒤로 한 채 다시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저만치 전화박스가 보이고 그 옆에 젊은 연인 한 쌍이 손을 맞잡은 채 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지나가면 그들도 뒤따를 모양이었다. 난 느닷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저 앞 전봇대에 전기가 흐르고 있는데, 신고 좀 해...”
 “예, 전기라고요?”
 그들은 채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도망쳤다.
 “아저씨! 꼭 좀 신고해 주세이!”
  나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는 그들을 향해 크게 외친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줄건히 내리는 빗줄기에 왜 그리도 마음이 움츠러들던지 서둘러 달아난 그들을 따라 가고픈 충동마저 일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왜 이 짓을 하나?’ 한껏 움츠러든 심신을 돌려 뒤돌아서려는데,
 아니, 이게 또 어찌된 일인가!
 저만치 앞에서 희끔한 물체가 또 다시 그곳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질 않은가! 얼핏 보니 머리가 짧은 게 고등학생쯤 되어보였다. 아무 영문 모르는 그는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고, 맞은편으로 돌아가 만류하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 나는 종전처럼 그를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빗속에서 지르는 고함소리는 한낱 부질없는 몸부림에 지날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갈 길이 바쁜 듯 빠른 발걸음으로 그곳으로 다가왔다.
 “야-! 오지마!”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른 채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를 향해 목청껏 외쳐댔다. 그러나 세차게 몰아치는 빗속을 무심코 걸어오던 그가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서 주저앉는 모습이 마치 신전에 몸을 의탁하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어쩐다?’
 찌릿찌릿한 기운이 감도는 그곳으로 다가가자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차마 더 이상 그곳으로 다가갈 순 없었다. ‘이럴 땐 누군가 좀 도와주기라도 한다면...?’ 나는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아저씨! 저 앞에 학생 하나가 감전되어 있는데 같이 들어가가 좀 구해봅시더”
 “뭐라꼬예? 전기감전이라꼬예?”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나는 그들에게 기대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있을 순 없는 일, 난 다시 그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 몇몇이 멀찌감치 물러서서 그곳을 바라보고있었다. 누구하나 나서서 구해줄 의향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다가가자니 다리가 찌릿찌릿해져오는 게 그들만 탓할 바도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후다닥 달려들어 후딱 건져내고팠지만 다 마음뿐이었다.
 ‘그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서둘러 달아난 그들이나 여기서 그냥 자리만 죽치고 있는 내 자신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순간 마음속 어디에선가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어차피 주어진 운명이라면...’
 나는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참으로 냉담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저만치 뒤에 있는 그가 마지막 몸부림을 하듯 몸을 한 번 뒤집더니 그대로 널브러졌다. 나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단호한 태도로 외면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나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펼치고 있자니 저만치 앞에서 트럭 한 대가 물살을 가르며 다가왔다. 뒤 짐칸엔 두툼한 비옷을 입은 사람이 두셋 타고 있었다. 나는 후줄건히 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가리며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다가오던 차가 전봇대 바로 옆에 멈추더니 자루가 달린 갈고리로 그를 끌어올렸다. 축 늘어진 그가 뿌연 물을 주르르 흘리며 짐칸으로 올려졌다.
 ‘부디 무사하기를...’
 나는 마음으로 다하지 못한 자괴감에 씁쓸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그래도 마음만 있었다면 아까운 생명 하나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진작 그를 구하지 못한 죄스런 마음에 무어라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를 건져 올린 그들이 차를 돌려 다시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환히 켜진 전조등 불빛사이로 그들의 모습이 설핏 눈에 띄었다. 나는 눈을 가리며 그들을 바라보다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들은...!”
 그랬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인덕에서 나를 태워준 바로... 나는 냅다 얼굴을 가리며 뒤돌아섰다. ‘차르르’ 물을 가르며 그들이 지나가자 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모두 물뿐이었다.

 

 

 

 

 

Part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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