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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그녀가 나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였다면 그런 물난리 속에서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냐며 따귀라도 후려쳤을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강한 그 무엇이 나의 시선을 확 끌어
당겼다.
한동안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리던 그녀가 길다랗게 드리워진 핸드백 속으로
동전을 집어넣으며 나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선 그녀, 도시 이방인에 대한 경계의
눈빛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마음같아선 그녀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팠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몇 번 눈길을 주고받자니 둘은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줄근히
내리는 빗속에서 선남선녀가 오지도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주고받는 눈길, 가히 아름답다고 여겨질 법도
하였건만 어수룩히 몰려드는 어둠은 그녀를 가만 두질 않았다.
“택시!”
어쩔 수 없었던지 그녀는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그 광경이 못내
아쉬웠던지 그녀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인덕가는데요?”
“인덕요?”
한동안 고민을 하던 운전사 아저씨가 도저히 안되겠다는 듯 고개를 쩔래쩔래 흔들며
창문을 닫았고, 그렇게 몇 대의 택시를 보낸 그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
털래털래 걸어오는 모습이 꼭 뭇 사내랑 며칠간 질탕하게 놀아난 뒤 돌아오는 바람난 아낙같았다. 비에
흠씬 젖은 그녀를 보자니 소박맞은 여인의 측은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어버린
아낙에게 용서 못할 미움같은 것마저 일었다.
“택시!”
난 보란 듯이 그녀를 뒤로 한 채 택시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가는데요?”
“오광장요!”
“오광장 어디요?”
“저-, OO백화점 있는 쪽인데요?”
여차하면 태워주지 않겠다는 인상에 난 말을 더듬거리며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쪽은 안되는데요?”
“와요?”
“아저씨! 그거 몰라서 묻는기요? 오거리만 넘어가 보소, 온통 물바다라니까!”
“그라머, 우야면 되는데예?”
“우야긴 우야는 기요? 걸어가야지!”
그도 적잖이 걱정인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얼른 창문을 닫았다. ‘치리리’ 물을 튀기며 지나가는
차가 왜 그리도 원망스럽던지 마음같아선 발로 뒷꽁무니라도 한 방 걷어차고 싶었다.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잠시 한 눈을 판 건 피장파장, 다시 둘은 잠시 어정쩡한 기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차피 걸어가야할 길이라면 이렇게 마냥 죽치고 있을 순 없는 일, 난 따라나서려면 지금 따라오라는
듯 힐끔 눈치를 주고선 육거리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그녀도 도저히 안되겠다는 듯
냅다 나의 뒤를 따라 붙었다.
빗물에 씻겨져 나간 아스팔트 도로가 흉측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로 갈갈이 찢겨진
나뭇잎들이 비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간간이 하반신을 파고드는 빗줄기에 길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은
행여나 우산을 놓칠 새라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삐 오가고 있었다. 저만치 뒤따르던 그녀도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어느새 나의 등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에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도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가늘어졌고, 번화가 도심 속의 고요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뒤돌아서서
무어라 말을 붙여보고 싶었건만 행여 지레 겁을 집어먹고선 서둘러 달아나지나 않을까 차마 말을 건넬 순
없었다. 그랬다. 난 그런 부류의 존재였다. 마음속으론 그토록 간절히 원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온 세상을 얻은 듯한 기쁨으로 충만하였건만 정작 알고보면 모두 다 마음뿐, 도심 언저리에 맴도는 그
숱한 사랑 하나 변변하게 챙기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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